힐링투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스테이케이션’이 뜨는 이유

  • 입력일 2016-08-31 19:47:26
  • l 수정일 2016-08-31 20:16:22
성인 50%, 여름휴가 꼭 여행가지 않아도 된다 … 번아웃 사회서 ‘다 놓고 싶은’ 마음 반영
일본 홋카이도대학교 교정은 학생과 교직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사랑받은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서울에 10년간 살면서도 정작 유명하다는 ‘핫플레이스’를 찾은 기억이 그리 많지 않네요. 인파가 몰리지 않는 이때 느지막히 휴가를 내고 쉬려고 합니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한모 씨(26·여)는 철지난 여름휴가 계획이 속칭 ‘방콕’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 소셜커머스가 회원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름휴가 계획 조사에서 ‘집’이 바다, 강에 이어 가고 싶은 휴가지 3위로 꼽혔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어디론가 떠나야만 진짜 휴가를 즐겼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 ‘머무는 것’도 휴가라는 개념이 생기며 굳이 인파가 몰릴 때 아등바등 피서지를 찾는 사람은 줄어드는 추세다.

전국에서 피서 인파가 한꺼번에 한정된 휴양지로 몰리다보니 주차전쟁, 바가지요금, 쓰레기전쟁 등에 ‘집 떠나야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서다.  여행지에서 해방감을 느끼기는커녕 일상에서 치이는 스트레스가 휴가지에서도 가중된다는 게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재충전해야 할 휴가가 오히려 고생길이 된 경험 탓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집이나 근교 호텔 등에서 머물며 업무와 멀어져 ‘나만의 일상을 온전히 즐기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이 대세로 떠올랐다. 머물다(stay)와 휴가(vacation)가 합쳐진 신조어로 2008년 전후로 생겨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융위기와 비싼 기름값 때문에, 영국은 파운드화 가치 하락으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이같은 트렌드가 형성됐고 2009년 미국 메리엄 웹스터사전에 등록됐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스테이케이션에서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빡빡한 일상 속에서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다 놓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데서 차별화된다.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조차 짜증나고, 예약하기 귀찮으며, 여행지에 도착해서 평소보다 더 힘들게 보내야 하는 휴가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 10년 전만 해도 ‘웰빙’이 대표 트렌드 키워드였다면 최근엔 ‘생존’으로 바뀐 것도 한몫한 듯하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요즘 같은 ‘성과주의’, ‘피로사회’에서 혼자 있는 시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회사에서나 회사 밖에서나 과로는 사람을 소진시켜 ‘번아웃(탈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무리하게 바캉스계획을 짜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나태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김모 씨(32·여)는 “휴가는 쉬려고 가는 것인데 매번 휴가지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쉬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며 “올해는 근처 호텔을 예약해 자고싶을 때 잠자고, 혼자 ‘미드’를 몰아보고, 유명하다는 맛집의 코스요리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폭염이 한풀 꺾이고 날씨가 선선해져서 잘 됐다고 생각한다”며 “매일 반신욕을 즐기고 누군가가 매일 치워주는 푹신한 고급 침구에서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 씨나 김 씨처럼스테이케이션을 계획하는 사람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올해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0.6%가 ‘여름휴가에 꼭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된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2014년 48.5%, 2015년 51.7%가 휴가 대신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활용하면서 보내겠다고 답했다.

스테이케이션이 선호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수기 인파, 바가지요금 등으로 기분 좋은 여행을 기대하기 힘들어서’(72.1%·이하 중복 응답)다. 또 여행을 가더라도 레저활동을 하는 것보다 ‘숙박하는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겠다’(55.4%), ‘각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45.8%)고 답해 머물면서 하는 활동을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는 자유’가 주는 힐링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내맘대로 하나 되지 않던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쉬게 하는 건 전통사회 때부터의 오랜 정신수양법이기도 했다. 뭔가 집착해 열심히 매달리는 것 못잖게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가 중요한 것은 지친 뇌와 몸을 쉬게 해주고 일상으로 복귀할 에너지를 충전해주게 된다. 꼭 어떤 책을 읽어야겠다거나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멍때리기’를 하며 푹 쉬는 것도 심신이 초토화된 한국에선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 정희원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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