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경주의 왕릉과 석탑 1 … 신라천년의 고집과 자존심의 결정체

  • 입력일 2015-04-24 22:11:21
  • l 수정일 2015-04-28 11:14:23
56왕중 37개 왕능묘 남아 … 삼국통일 무열왕과 김유신 묘, 명당 자리에 조선왕능보다 웅장

경주 사람들은 한참 목에 힘이 들어가 있고 기개가 있어 굽히길 싫어한다. 폼을 꽤 잡는다고나 할까.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경주를 지난 2월 8~9일 다시 찾아와보니 신라 천년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왕릉과 석탑, 절 등을 다니면서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경부고속KTX를 타고 신경주역(서경주)에 내려 가장 가까운 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았다. 보물 122호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이번 여행의 무사안녕을 빌고 법흥왕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주 율동마애여래삼존불상
신라왕릉은 56왕 중 37왕의 능묘가 확인됐거나 추정되며, 19왕의 능묘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오직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만이 경기도 연천군에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경주시에 집중 분포돼 있다.
승리한 자의 역사만 기록된다고 했다. 백제, 고구려의 왕릉은 거의 남아 있는 게 없는 반면 신라의 왕릉은 이렇게 많이 보존돼 있다.

경주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에 모여있는 게 법흥왕릉 진흥왕릉 무열왕릉 서악리고분군이다. 법흥왕릉에 가보니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왕(재위 514~540)으로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나라의 틀을 세웠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유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워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이를 키우려 했다면, 법흥왕은 화랑을 내세웠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종교에 바탕을 둔다. 신라는 중국의 유교를 가르치지 않고 신라 고유의 정신으로 화랑을 무장시켰다.
법흥왕릉
다음은 무열왕릉(제29대왕, 재위 654~661)이다.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경내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다. 문무왕 원년(661년)에 세워졌으나 비신(碑身)이 없다. 도굴된 것인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것인지 알길이 없다. 비신의 파편 하나가 1935년 4월2일 무열왕릉 앞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릉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의 이수(상단)와 귀부(하단). 중단의 비신은 일제가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춘추(金春秋)는 외교의 달인으로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비문은 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짓고 쓴 것으로 전해진다. 김인문의 묘는 신작로(20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놓여 있다. 당나라에 인질외교의 볼모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은 충효의 정신이 갸륵하고 서글프다.

신라 31대 신문왕 12년(692)에 당의 중종은 사신을 보내 김춘추의 묘호(廟號)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고 쓴 데 대해 시비를 걸었다. 이 때 신문왕은 “생각컨대 우리 선왕(先王)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양신(良臣) 김유신을 얻어 동심위정(同心爲政)으로 삼국통일(一統三韓)을 이뤘으니 그 공적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끝내 김춘추의 묘호를 고치지 않았다. 여기서 동심위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공로가 대등하고 김유신을 왕의 반열에 준해 높였다는 뜻이니 의미심장하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는 높이 1.3m, 길이 3.8m, 폭 2.49m 규모이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의 씩씩한 기상이 나타난다. 비석의 갓머리인 이수(螭首) 전면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다. 전면·가운데·후면 등 이수는 3겹이며, 각기 두마리씩 용이 그려져 있다. 이수와 귀부는 동양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수는 뿔이 없는 용의 머리이고, 귀부는 거북을 뜻하니 무한한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열왕릉 인근에 있는 게 서악리고분군과 서악서원이다. 선도산(仙桃山)의 서남 자락에 있다. 신라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르던 시기에는 묘가 평지에 있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형식이었다. 그러나 정식 왕호가 붙여진 법흥왕 이후엔 경주 분지의 좌우에 펼쳐진 산지의 말단부 구릉에 왕릉이 조성되면서 묘 양식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변화의 스타트가 서악리고분군이다.

서악리고분군의 5기묘는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나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분 높이는 15m에 불과하지만 밑둘레가 110~140m로 엄청나다. 이런 규모는 오히려 조선왕조 왕릉보다도 크면 컸지 작지 않다. 더욱이 국가에서 경주 왕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1990년대 이전까지 경주의 많은 왕릉 또는 관련 고분군들을 시민들의 힘으로 유지 보존했다니 대단하다는 탄성이 나온다. 예초기도 없던 시절, 풀만 깎는 일도 대역사였을 것이다.
경주 서악고분군
서악리고분군에서 북북서쪽으로 서악리삼층석탑과 도봉서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진흥왕(眞興王), 진지왕(眞智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 등 4개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도 근처다.

바로 옆에 있는 서악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 경주부윤을 지낸 이정(李楨, 1512∼1571)이 김유신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세운 사당에서 비롯됐다. 당시 경주 유림들이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해 이정이 퇴계 이황과 의논해 이를 받아들였다. 퇴계가 ‘서악정사’라 이름짓고 손수 현판도 섰으나 임진왜란 때에 서원이 모두 불에 타 지금의 자리에 1602년 묘우(위패를 모신 곳), 1610년 강당(시습당)과 동·서재(숙식 장소)를 다시 지었다. 영귀루라는 누각도 조성되어 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지금의 현판은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 명필 원진해가 쓴 서악서원 현판
무열왕릉에서 차로 10여분 떨어진 김유신 장군묘에는 ‘신라태대각간(太大角干)김유신묘’라고 씌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왕릉에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문무왕(무열왕의 장남, 제30대왕, 재위 661-681)은 무공을 세운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부여했고, 뒷날 흥덕왕은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했다.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돼 있다.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다. 경주 왕릉에는 몇 군데에 지신상이 조각돼 있으나 그 우수함이나 규모에 있어선 김유신 장군을 따를 수 없다. 또 묘를 지탱하는 호석과 난간석 사이에 박석을 깔아 단단하게 지탱하게 한 것도 특징이다.
무열왕릉이나 김유신장군묘는 각각 문무왕 원년과 14년에 조성됐다. 문무왕에게 김유신은 외삼촌이 된다. 모두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위치해 있다.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김유신 장군의 묘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품격미도 높다.
김유신장군묘를 보고 양동마을에 가기 전에 들른 곳이 나원리오층석탑(국보 39호)이다. 세월이 가도 탑의 흰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감은사삼층석탑(국보 112호), 고선사삼층석탑(국립경주박물관 소재, 국보 38호),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 국보 21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한다.
나원사는 오래된 절이 아니고 근래에 들어선 절이다. 옛 절의 금당(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본존불)을 모시는 곳으로 전당에 금칠을 했다해서 금당이라 함) 자리 뒤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양산 통도사와 같은 경우지만 이례적이라고 한다. 보통 석탑은 금당의 앞쪽에 놓여져 있게 돼 있다.
경주 나원리오층석탑
탑 전체의 높이가 9.76m(8세기경 축조)로 경주 지역에서는 감은사탑(682년, 13.4m), 고선사탑(686년, 9m)와 함께 톱3로 꼽힌다. 석가탑의 높이는 8.2m에 그친다. 낙수면의 합각이 예리하고 네 귀퉁이도 하늘 높이 올라 경쾌하다. 각 전각부에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고 상륜부에는 파손된 노반만이 남아 있다. 순백의 오층석탑에서 바람이 스치고 갈 때마다 적요함을 깨고 울려퍼졌을 풍경소리의 영롱함을 상상하게 된다. 단조로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숭고함이 느껴진다.
지붕돌이 기와골로 돼 있어 황룡사터 구층목탑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탑이 있는 절터 바로 뒤쪽에는 산이 있으며 앞쪽으로 비교적 넓은 들과 형산강 줄기(서천)이 펼쳐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무릇 풍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형이다.

여행 첫날 오후 양동마을을 둘러보고 저녁에 들른 게 안압지(동궁과 월지)다. 야경이 아름답다. 안압지, 포석정, 보문호, 덕동호 등 경주의 호변 관광지는 차후에 모아 소개해야 할 듯 깊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의 야경

  • 정종호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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